격을 갖춤
S와 이야기를 하던 중 공유 받은 S의 생각입니다.
1.
- 번아웃 증후군: 장기 피로로 인한 열정 상실
- 권태기: 어떤 일이나 상태에 시들해져서 생기는 게으름이나 싫증
위 같은 증후군은 단순히 많은 업무에서 오는게 아니다. 누군가는 한가지의 일을 쉽게 포기하고 자신이 처한 환경의 문제를 외치지만 다른 누군가는 만가지의 일을 버젓이 해내고 힘든 내색 하나 없다. 어느샌가 번아웃 증후군은 포기를 변호하기 시작했고 권태기는 식어버린 열정, 식어버린 사랑을 정당화하는 수단이 되었다. 내가 처한 환경, 시기가 내가 지금까지 받던 부담이라는 짐을 대신 받아주고 나는 홀가분하게 그 사명감에서 벗어난다. 이러한 용어들에 대한 사람들의 사회적 옹호는 환경과 시기의 의인화를 만들었고 편하게 환경과 시기에게 책임을 넘긴다. 의인화는 문학적 허용이기에 실제로는 아무도 책임을 대신 받아주지 못한다.
2.
‘격’은 다름말로 품위다. 인간이 인간다운 품위를 유지한다는 건 원초적인 생존 이상의 사치다. 사치를 부리지 않는 자를 비판할 권리는 없다. 남에게 사치를 부리라고 권고할 이유는 더더욱 없다. 그렇지만 현대 사회에서 인간다운 생존은, 원초적인 생존을 의미하지 않게 된지 오래이다. 사치가 아닌 생존의 영역에 들어간 ‘격’은 그렇지 못한 자들을 자연선택시키는 데에 일조한다고 보인다.
3.
인격을 갖춘 자는 부담을 받아들이는 능력이 있다. 이때 이런 부담들은 때로는 서로 상충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상충하는 부담들 마저 받아들일 수 있다. 그는 여유로워 보이고 걱정이 없어 보인다. 그와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그가 수많은 고민이 있는걸 알아채기는 커녕 본인의 고민마저 잊게 된다. 그의 여유로움은 남들의 부담마저 덜어주곤 한다.
만약, 나에게 당장 2주뒤에 전 세계 사람들이 보는 생중계 방송에서 케이크를 정확히 이등분하라고 한다면 걱정과 피로로 앓아눕고 말 거다. 그 일이 나에게 엄청나게 부담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언제 부담을 느끼는지 생각해 본다면 아래와 같다.
- 나에게 주어진 업무가 내 능력 이상이라고 생각할 때
- 나에게 영향을 주는 나의 예상과는 다른 흐름
그렇다면 부담은 어떤 상황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가짐에서 비롯됨을 알 수 있다.
부담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4.
시간과 자원은 한정적인 상황에서 내 능력 이상의 ‘어쩔 수 없는 일’이 있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을 정의하는 과정은 여러 고민을 동반한다.
- 우선 도덕적 기준에서 ‘범법자의 어쩔 수 없는 일’은 인정되어선 안될 것이다. 범죄에 예외를 둔다는 것은 법의 존재 목적에 위반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예외의 존재는 기준을 흐리게 만들고 판단에 혼란을 준다.
-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핑계는 내가 마땅히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못하도록 막는 장애물이 되기도 한다. 자신을 속이는 유혹이다.
부담을 받아들인다는 건 어쩌면 어쩔 수 없는 일의 존재를 인정하는 걸지도 모른다. 내가 어떠한 마음가짐을 갖더라도 내가 할 수 없는 일은 존재함을 인정함. 아니면 부담 자체를 없애버리는 마음 가짐을 갖는 걸 수도.
5.
인격을 갖추게 된다면 진짜로 어쩔 수 없는 일을 구분해낼 수 있을까?
아니면 인격을 갖추게 된다면 이러한 일을 구분해야 할 부담을 받아들여, 굳이 구분할 필요가 없음을 알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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