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 속의 필연


원칙은 바뀔 수 있음이 원칙이다.

Introduction


세상은 대체로 모호하다.

  • 정책은 정의로움과 부당함의 속성을 동시에 가진다.

  • 객체는 상태의 중첩에 놓여 있으며 입자성과 파동성을 동시에 가진다.

  • 가설 검증에서 채택되는 가설은 언제나 오류를 범할 확률을 동반한다.

세상은 흑과 백이 아닌 ‘덜 회색’과 ‘더 회색’에 가깝고, 벌어지는 일들은 예외 없는 인과가 아닌 상관성과 확률에 기반한다.

완전무결함은 사람이 쌓아 올린 믿음이 영역이 아닌 실재의 영역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불확실함을 인정하며 불안하지 않을 수 있는가


하지만 우리는 대체로 완전무결함을 추구한다. 0과 1의 명확한 구분에서 안정감을 느끼며 확실한 미래를 예측하고 싶어한다. 끊임없이 선택해야 하는 인간의 조건을 고려할 때 이는 자연스러운 속성이다.

그러나 불확실함을 부정하며 완전무결함을 추구하는 것은 종종 부작용을 낳는다. 부정하는 과정에서 무시한 - 주로 크기가 작은 - 속성들이 사실은 중요했거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중요해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불확실함을 부정하는 믿음은 독단으로 변모하기 쉽다.


행복한 시지푸스


철학자 알베르 카뮈는 돌이 굴러 떨어질 것을 앎에도 끊임없이 돌을 밀어올리며 삶의 의미를 찾는 ‘행복한 시지푸스’를 이야기한다.

카뮈가 제시하는 삶의 태도는 다음 두 가지와는 구별된다:

  1. 부정적 낙관주의: 돌이 떨어지는 것을 부정하며 행복하게 돌을 밀어올리는 삶
  2. 허무주의: 돌이 떨어지는 것을 알고 아예 돌을 밀어올리지 않는 삶

카뮈는 이 둘이 아닌, 돌이 떨어지는 것을 앎에도 행복하게 돌을 밀어올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삶의 이유를 한참 고민하던 예과 2학년 시기, 나는 시지푸스의 행복이 이해가 되지 않았었다. 어떻게 행복할 수 있지 싶었다.


우연 속의 필연


그러나 생각해보면, 사실 우리는 누구나 시지푸스와 같은 처지이다.

우리는 스스로가 어떤 우연으로 지금 당장, 혹은 언제든 삶을 마감할 수 있음을 안다. 관계가 영원하지 않을 수 있음도 안다. 하지만 몇 시간 뒤에, 혹은 내일 당장 기막힌 확률로 세상을 떠날 것을 걱정하며 사는 사람은 거의 없다. 우리는 불안함 없이 죽음의 위험을 유보하며 삶에 충실하게 살아간다. 영원을 약속하고 사랑하며 살아간다.


이러한 태도는 다른 차원의 불확실함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꿈꾸는 미래가 불친절한 변수로 인해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음을 알면서도, 내가 틀릴 수 있는 가능성을 인정하면서도,

불확실함을 부정하지도, 그것에 압도되지도 않으면서, 현재의 선택과 행동에 온전히 투신하는 삶을 살고 싶다.

우연을 앎에도 필연을 믿는 삶을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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